-
-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양양 서림사지 절터에서 삼층석탑과 함께 발견된 불상으로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5년 발견 후 현서분교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나, 발견 당시부터 머리가 일부 없고, 불신도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특히 팔각형의 대좌는 조각 수법이 매우 우수한데 일부 부재가 없어지고 위치가 뒤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240cm, 불상 높이 125cm이다. 발견 당시 불상의 주변에는 주춧돌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입상 금동불상 1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금동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원래의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된 돌조각. 자세히 보아하니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싼 것처럼 보인다.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부처를 ‘비로사나불’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직접 만날 수 없는 부처님 대신 우리는 불상이란 존재를 만들었고 부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람을 불상에게 대신 기원한다.불경에 따르면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선림사지 터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불상에게 안녕과 건강을 기원해 본다. 비록 깨지고 흐트러진 불상이어도 부처에게 그 뜻을 고이 전해주리라.
서면
-
-
구룡령 옛길
용이 선택한 길
양양에서 홍천으로 넘어오는 고갯길로 그 모양이 마치 용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 구불구불하다. 오래전에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사용했던 산길이었는데, 일제강점기 무렵부터 새로운 도로의 개통으로 방치되다시피 하다가 최근 트래킹 코스로 복원되었다. 미시령보다 부드러운 산세와 울창한 숲으로 산림욕을 즐기기 좋고, 투명하게 흐르는 계곡과 왕복 3~4시간의 적당한 코스로 초보자에게도 추천하는 길이다. 용이 선택한 길 지상에서 긴 시간을 기다리던 요물이 드디어 천운의 날을 맞이했다. 하늘에는 녀석의 몸짓을 가려줄 먹구름이 가득했고, 산에는 오색의 단풍으로 화려한 장막이 씌워졌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는 없을 기회. 천년을 숨죽이고 있던 커다란 용은 온 힘을 다해 지상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을 쳤다. 그리고 잠시 뒤, 감쪽같이 사라졌다. 녀석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듯 구불거리는 길을 따라 산을 넘는다. 승천을 가려줬던 찬란한 단풍은 올가을에도 여지없이 화려하게 피어났다. 용이 선택했던 마지막 길. 깊은 숲에 남아있는 그 길을 걸으며 신비한 정취에 빠져본다.
서면
-
-
양양향교
배움을 향한 걸음
고려 충혜왕 때 이곳이 옛 학교의 터였음을 알게 되어 향교 건립지로 선정하였고, 정랑과 현유의 위패를 봉안하여 지방민들의 교육 장소로 창건된 곳이다. 오랜 역사를 지닌 만큼 국보급 서화와 조각 등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었으나 6.25전쟁 당시 화재로 소실되었고, 이후 1952년, 1953년, 1990년 등 꾸준한 중건과 보수를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약 5km 인근에 남대천과 양양송이밸리 자연휴양림이 있으니, 당일 관광코스로 함께 돌아보기 좋다.
배움을 향한 걸음
붉은 홍살문 뒤로 깔끔한 돌계단이 나를 기다린다.정성을 들여 쓸고 닦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어제 깎은 것처럼 반듯하고 깨끗하다. 정갈한 마음과 몸가짐으로 계단을 한 칸씩 오르며 가르침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저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 스승을 떠올려보니,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게 된다. 지금의 학교와 너무도 다른 풍경. 어쩐지 몸가짐을 바르게 하게 되는 향교는 옛 가르침의 터전이자 지역의 자존심 같은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높은 언덕 위, 가지런한 돌담으로 지켜지고 있는 고즈넉한 양양의 향교. 여기에 고이 모셔진 위패까지 만나게 되면 더욱 정숙하게 된다. 스승의 그림자까지 존경하며 배움에 몰두했을 학생들과 나라를 위한 인재 육성에 최선을 다했을 스승들. 향교를 뒤로하고 돌계단을 하나씩 내려오며, 과거부터 이어진 교육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깨우쳐본다.
양양읍
-
-
서림사지
감쪽같이 사라진 사찰
서림사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정조 때 편찬 된 [현산지]를 통해 사찰의 이름은 알게 되었으나 그 규모와 성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며 절터 주변에서 사찰에 사용했던 기와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감쪽같이 사라진 사찰
사라진 절터에 남아 있는 건 굴러다니는 기와 조각들 몇몇뿐이다. 왜 만들어져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의 시간에는 분명, 서림사지가 존재했다. 많은 것들이 이렇게 사라진다. 도시개발로 밀어낸 산은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맑게 흐르던 냇가는 시멘트 속 저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소멸과 탄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을 버텨낸 것들의 진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서림사지의 빈터를 둘러보며 이곳에 서 있던 웅장한 사찰을 상상해 본다. 지켜졌더라면 충분히 가치 있었을 사찰. 주변의 산세와 아름다운 경치가 조금이나마 아쉬움에 위로가 되어 준다.
서면
-
-
선림원지 삼층석탑
쓸쓸한 석탑의 외침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에 남아있는 화강석 3층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보물 제444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중기단 위의 3층 형태로 총 높이는 5m이다. 석탑의 상층기단중석에는 불교의 여덟 수호신(팔부중상)이 양각되어 있고 한쪽에는 탱주 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65년 복원된 것이다.
쓸쓸한 석탑의 외침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화려했던 사찰의 전성기도, 이곳을 찾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함께했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터전을 지키고 선 우직한 석탑. 석탑에 새겨진 8명의 신들은 과거를 보고 있는 듯, 현재를 보고 있는 듯 빈터전의 사방을 지켜보고 있다. 세월에 깎이고 곳곳에 상처를 입어 멋스러운 기품보다 아픔이 더 많은 것 같은 외로운 석탑. 하지만 열심히 쓸쓸함을 견디며 이곳의 의미를 외치고 있다.
서면
-
-
일현미술관
2005년 양양군 최초로 개관한 일현미술관은 야외조각 공원과 주전시장을 비롯하여 산책로와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으며 다양한 프로그램과 이벤트 개최로 지역사회, 대중과 꾸준히 소통을 이어가는 미술관이다. 야외 조각 공원에서는 양양의 풍경에 녹아든 현대미술작품을 관람할 수 있으며, 실내전시장에서는 매번 다른 주제의 기획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인생 명작을 만나다
저 멀리 보이는 설악과 바다는 하나의 배경이 되고,그 앞에 놓여있는 기묘한 미술품은 자연에 그려진 작품이 된다.생전 처음 보는 회색의 조각품도, 볼수록 빠져드는 마성의 그림도 자연 속에 놓여있으니 더 많은 이야기가 상상이 되고, 더 다양한 감정들이 느껴진다.루브르 박물관의 세계적 작품만이 명작이 아니다. 푸른 산을 배경으로 한 조각도, 해풍이 화가인 듯 부드러운 그림도 이곳에서 만났기에 내 인생의 가장 멋진 명작이 된다.양양의 눈부신 자연이 초대하는 미술관. 인생의 명작을 만나러 일현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손양면
-
-
선림원지 승탑
과거의 예술
선림원지 가장 북쪽 끝에 자리하고 있는 승탑은 원래 뒤쪽 50m 위 산기슭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승탑의 용도는 승려(스님)의 유골이나 뼈를 모셨던 것인데, 선림원지 승탑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된 부재를 수습하여 현재 위치에 1965년 복원한 것이다. 원래는 아래, 가운데, 위로 나눠진 3단 받침돌과 몸돌, 지붕돌, 상륜부로 완벽히 만들어진 것이나 현재는 바닥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다. 특히 바닥돌은 자연석 중 땅 위에 드러난 부분만 평평하게 다듬어 그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단부 바닥돌 4면에는 사자, 아래받침돌에는 연꽃, 가운데 받침돌에는 구름과 용이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과거의 예술
다정한 사자 한 쌍이 다양한 모습으로 맨 밑을 지키고 있다.그 위를 포근히 덥고 있는 여러 겹의 연꽃잎들. 그 한 단계 위에는 빠르게 움직이는 구름 속 승천하는 용이 보인다. 그리고 또 한 칸 위, 아래보다 조금 작지만 더 수려하게 핀 연꽃이 무언가를 공손히 받치고 있다. 현재 선림원지 승탑이 보여주는 미술은 안타깝게도 여기까지.그 위 어떤 조각들이 한 단계씩 올라가 있었는지는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하단의 생생한 조각들이 상단의 모습을 더욱 궁금하게 만든다. 마지막 연꽃 위에는 부처님이 앉아 있었을까.맨 위에는 팔각형의 지붕이 비를 가려주진 않았을까.작은 승탑 하나가 지니고 있는 통일신라의 화려한 예술. 한가로운 선림원지 터에서 과거의 예술을 상상해 본다.
서면
-
-
선림원지 석등
어둠을 몰아내는 경내의 빛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 내 자리한 높이 약 3m의 석등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형을 보여준다. 오랜 세월에도 석탑은 점등하는 부분, 화사석과 옥개 등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하대의 8개 측면에는 기단 문양이 음각되어 있고, 그 위 8각에는 꽃 모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에 달려있던 귀꽃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운 석등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경내의 빛
깊은 산의 절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이 서둘러 찾아온다.어느새 나타난 스님은 작은 초에서 불을 덜어내 석등 중앙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잠시 뒤 서서히 번지는 작은 불빛. 주변의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며 경내 곳곳의 등대가 되어 준다. 이제는 절의 흔적만 남아 있는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아직도 고운 자태를 뽐내는 석등을 만날 수 있다. 꽃, 구름, 섬세한 기단 문양으로 과거에는 더 화려했을 선림원지의 석등. 세월에 닳아 그 섬세한 조각들은 무뎌졌지만, 석등이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비율과 우아함으로 여전히 주변을 밝히고 있다.
서면
-
-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
존경받은 승려의 이름
양양군 서면 선림원터에 서 있는 승려 홍각선사의 탑비이다. 비석의 형태나글씨를 보아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비의 주인공인 홍각선사에 대해서는 자세히 남아 있는 기록이 없다. 다만 비의 내용과 [대동금석서]에 의하면 홍각선사는 경전을 잘 외웠으며, 역사에 해박하고, 명산을 두루 찾아다니며 참선에 열중했다고 한다. 또한 수양이 깊어 따르는 제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존경받은 승려의 이름
‘스스로를 존경하면 다른 사람도 당신을 존경할 것이다.’중국의 공자는 스스로가 정도를 걸어 바르게 살면, 다른 사람들은 자연히 따르게 된다는 명언을 남겼다. 어떤 인물이었는지 남아있는 기록은 극히 드물지만, 섬세한 조각이 받들고 있는 탑비를 보아 홍각선사는 꽤 존경받는 스승이자 승려였던 것이 분명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홍각선사란 이름만큼은 선명하게 남겨두고 떠났다. 따르는 제자들이 운집을 이룰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스승. 그럼에도 본인의 학문에 열중하고 참선을 소홀히 하지 않았던 참된 승려. 수많은 존경이 따랐던 사람이라면 그 성품과 올곧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상상해 볼 수 있다. 선림원지 커다란 나무 아래, 자비로운 미소로 푸른 산을 바라보는 승려가 보인다. 그리고 저 멀리 젊은 스님 하나가 그를 부르며 빠르게 다가온다. “홍각선사님!”
서면
-
-
김택준가옥
변치 않는 품격
조선 후기에 지어진 주택으로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옥은 ‘ㅓ’형태의 안채와 ‘ㅣ’형태의 사랑채로 이뤄졌으며 안방과 상방 전면에 환기구 시설도 갖추고 있다. 앞면 마당은 두 개의 출입구가 있고, 사랑채 건물은 남자들이, 안채 쪽은 여자들이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마을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지리적 위치와 뒤편 야산과 어우러진 조화가 돋보이는 가옥으로 현재는 경주 김씨 후손이 거주하고 있다.
변치 않는 품격
야산 바로 밑 마을의 가장 높은 곳. 뒤로는 든든하게 산이 받쳐주고, 앞쪽으로는 소작농의 땅과 마을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은 아무래도 지체 높은 양반이나 마을의 지주가 차지했던 명당으로 보인다. 약 200여 년 전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김택준 가옥에는 아직도 전성기의 자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부잣집에서나 볼 수 있던 왼쪽 마당의 전용 우물과 별도로 분리되어 있는 사랑채와 안채. 고풍스러운 팔작지붕 아래 마을을 내려 보던 작은 마루까지. 강산이 수십 번 변한 긴 세월에도 끄떡없는 위엄 또한 당시의 전성기를 증명하는 듯하다. 오래된 가옥에서 양반이 된 것처럼 뒷짐을 지고 마당을 걸어본다.시간이 아무리 지난다 한들 이 가옥의 품격이 어디 가겠는가.
현남면
-
-
영혈사
약수에 남겨둔 마음
신흥사의 말사인 영혈사는 신라시대 689년(신문왕 9)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효가 입적한 곳이라 하여 영혈사란 이름으로 불렸지만 1688년 숙종이 불에 탄 절을 새로 지으며 그 이름을 영천사로 바꾸었었다. 그러나 고종 때(1887년) 다시 영혈사란 이름을 되찾았으며,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1950년에 지어진 것이 남아있는 것이다. 경내에는 극락보전, 산신각, 지장전, 요사 등이 있으며 원효대사 지팡이 전설로 유명한 약수가 샘솟고 있다.
약수에 남겨둔 마음
고즈넉한 사찰 주변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샘물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에 이끌려 도착한 곳엔 설악산의 맑은 구슬이 솟아나고 있다.일찍이 원효대사는 지팡이 하나로 영혈사의 샘물을 물이 귀한 낙산사 홍련암에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홍련암에 나누어 주고도 여전히 넘치게 솟아나는 샘물을 보니, 마치 부처에게 닿기 위한 중생들의 끝없는 기도를 보는 듯하다. 구슬같이 투명한 샘물로 마른 입술을 적셔본다. 어느 날 이곳에 들린 부처가 목을 축이다 내 마음을 들어주길 바라며, 맑은 샘물에 나의 기도를 빌어놓고 발걸음을 뗀다.
양양읍
-
-
명주사부도군
승려의 마지막 모습
명주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총12기의 부도로, 승려들의 유골이나 사리 등이 보관되어 있는 무덤을 뜻한다. 12기의 부도군은 원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아 보존하고 있다. 12기의 부도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7기는 원당형, 5기는 석종형에 속한다. 현재 4기의 비석과 함께 명주사 부도군 밭에 남아있다.
승려의 마지막 모습
죽음은 결국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막연하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꼭 한번 겪어야 하는 당연한 것이다. 여기, 자연의 순리대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 승려들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있다. 12명의 승려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자연으로 돌아감에 있어 마지막 모습은 모두 같아 보인다.먼저 생을 다한 승려들을 바라보며 감히 부처의 뜻을 헤아려본다. 허무한 삶이 되지 않으려면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그러나 결국, 모두에게는 끝이 있으니 그리 욕심낼 필요는 없다는 것. 승려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교훈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명주사의 품으로 들어가 본다.
현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