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선림원지 석등
어둠을 몰아내는 경내의 빛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 내 자리한 높이 약 3m의 석등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기본형을 보여준다. 오랜 세월에도 석탑은 점등하는 부분, 화사석과 옥개 등을 완전히 갖추고 있다. 하대의 8개 측면에는 기단 문양이 음각되어 있고, 그 위 8각에는 꽃 모양이 뚜렷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에 달려있던 귀꽃은 떨어져 나갔지만 여전히 상하의 비례가 아름다운 석등이다.
어둠을 몰아내는 경내의 빛
깊은 산의 절에는 오늘도 어김없이 어둠이 서둘러 찾아온다.어느새 나타난 스님은 작은 초에서 불을 덜어내 석등 중앙에 살며시 내려놓는다. 잠시 뒤 서서히 번지는 작은 불빛. 주변의 어둠을 조금씩 몰아내며 경내 곳곳의 등대가 되어 준다. 이제는 절의 흔적만 남아 있는 양양의 선림원지에서 아직도 고운 자태를 뽐내는 석등을 만날 수 있다. 꽃, 구름, 섬세한 기단 문양으로 과거에는 더 화려했을 선림원지의 석등. 세월에 닳아 그 섬세한 조각들은 무뎌졌지만, 석등이 갖추고 있는 아름다운 비율과 우아함으로 여전히 주변을 밝히고 있다.
서면
-
-
선림원지 삼층석탑
쓸쓸한 석탑의 외침
양양군 서면 황이리 선림원지에 남아있는 화강석 3층 석탑으로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된다. 1966년 보물 제444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중기단 위의 3층 형태로 총 높이는 5m이다. 석탑의 상층기단중석에는 불교의 여덟 수호신(팔부중상)이 양각되어 있고 한쪽에는 탱주 또는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현재의 모습은 1965년 복원된 것이다.
쓸쓸한 석탑의 외침
모든 것이 사라졌다. 화려했던 사찰의 전성기도, 이곳을 찾던 수많은 사람들도 이제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다. 함께했던 모든 것이 허무하게 사라졌음에도 여전히 터전을 지키고 선 우직한 석탑. 석탑에 새겨진 8명의 신들은 과거를 보고 있는 듯, 현재를 보고 있는 듯 빈터전의 사방을 지켜보고 있다. 세월에 깎이고 곳곳에 상처를 입어 멋스러운 기품보다 아픔이 더 많은 것 같은 외로운 석탑. 하지만 열심히 쓸쓸함을 견디며 이곳의 의미를 외치고 있다.
서면
-
-
선림원지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이다. 발굴 당시 출토된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대량 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비석귀부 등 유물들로 추측해 보았을 때 9세기 후반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건물지와 선림원지삼층석탑, 선림원지석등,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 선림원지부도 등이 남아 있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
고상한 기품과 맞배지붕의 단아한 멋을 품고 있던 사찰. 금당과 조사당 등 여러 법당들이 어우러져 누군가의 휴식처이자 기도처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푸른 산과 한 몸인 것처럼 자연에 녹아있던 아름다운 사찰은 이제 그 흔적만이 처참하게 남아있다.9세기 말 화려한 중창 후 태풍과 홍수로 산이 무너져 폐사된 걸로 추정되는 이 절에는 현재 주춧돌과 건물지, 삼층석탑 등 몇몇 유물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한때는 누구보다 사랑받으며 존재감을 빛냈을 멋있는 사찰. 이제는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없고, 엣 흔적을 찾아오는 이도 매우 드물다. 지금은 그저 오래된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절터.하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역사는 찬란하게 쓰였을 것이다.
서면
-
-
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양양 서림사지 절터에서 삼층석탑과 함께 발견된 불상으로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5년 발견 후 현서분교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나, 발견 당시부터 머리가 일부 없고, 불신도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특히 팔각형의 대좌는 조각 수법이 매우 우수한데 일부 부재가 없어지고 위치가 뒤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240cm, 불상 높이 125cm이다. 발견 당시 불상의 주변에는 주춧돌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입상 금동불상 1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금동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원래의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된 돌조각. 자세히 보아하니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싼 것처럼 보인다.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부처를 ‘비로사나불’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직접 만날 수 없는 부처님 대신 우리는 불상이란 존재를 만들었고 부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람을 불상에게 대신 기원한다.불경에 따르면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선림사지 터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불상에게 안녕과 건강을 기원해 본다. 비록 깨지고 흐트러진 불상이어도 부처에게 그 뜻을 고이 전해주리라.
서면
-
-
서림사지 삼층석탑
석탑이 들려주는 이야기
양양 서림리 들녘에서 발견된 이 석탑은 서림사지 사찰 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5년 발견 후 보존을 위해 마을 주민들과 현서분교 교장이 학교로 옮겨 복원해 두었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전반적인 무늬와 모양으로 추측해 보았을 때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이 들려주는 이야기
화려한 장식도 섬세한 조각도 없는 단순한 삼층석탑. 작은 분교에 어색하게 서있는 석탑에서 집을 잃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이곳으로 옮겨진 지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석탑의 원래 자리는 품격 있는 경내. 서림사지의 탄생과 소멸을 모두 지켜봤기에 석탑은 절터에 그대로 남아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장소는 조금 아쉽지만 주민들이 소중하게 지켜낸 서림사지의 증거.석탑은 자신의 나이를 보여주듯 이곳저곳이 세월에 닳아 있다.그리고 약간씩 하늘을 향해 올라간 단의 지붕들. 그 지붕 아래 새겨진 줄무늬가 고려시대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고 보니 석탑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어쩌면 우리가 아직 해석하지 못한 흔적도 충분히 남아 있을지 모른다. 삼층석탑이 품고 있을 서림사지의 나머지 이야기.그 흥미진진한 역사가 꽤 궁금하다.
서면
-
-
서림사지
감쪽같이 사라진 사찰
서림사지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없다. 정조 때 편찬 된 [현산지]를 통해 사찰의 이름은 알게 되었으나 그 규모와 성격은 여전히 알 수 없다. 다만 고려시대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며 절터 주변에서 사찰에 사용했던 기와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다.
감쪽같이 사라진 사찰
사라진 절터에 남아 있는 건 굴러다니는 기와 조각들 몇몇뿐이다. 왜 만들어져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아무것도 확인할 수 없지만, 과거의 시간에는 분명, 서림사지가 존재했다. 많은 것들이 이렇게 사라진다. 도시개발로 밀어낸 산은 언제 있었냐는 듯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맑게 흐르던 냇가는 시멘트 속 저 밑으로 자취를 감췄다. 소멸과 탄생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 그럼에도 오랜 시간을 버텨낸 것들의 진중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서림사지의 빈터를 둘러보며 이곳에 서 있던 웅장한 사찰을 상상해 본다. 지켜졌더라면 충분히 가치 있었을 사찰. 주변의 산세와 아름다운 경치가 조금이나마 아쉬움에 위로가 되어 준다.
서면
-
-
범부리고인돌
과거에서 지혜를 얻는다
1973년 양양군 서면 범부리에서 주민들에 의해 발견돼 ‘범부리 고인돌’로 불린다. 범부리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무덤형태로 20m 간격을 두고 2기가 나란히 발견되었다. 남쪽에 위치한 1호는 탁자식의 변형으로 보이며 무덤방이라 불리는 내부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2호는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있고, 무덤방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2기 모두 크기와 형태는 비슷하다. 범부리 고인돌 근처 남대천 계곡 앞 오토캠핑장이 위치해 있으며, 공수전 계곡과 약 15분 거리로 인근 관광지 방문 시 한번쯤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과거에서 지혜를 얻는다
의식주 생활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는 청동기 시대.그때 이미 인류는 함께 살아가는 부족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혼자보다는 공존하는 사회를 선택한 사람들.하지만 이때 탄생한 것이 계급과 국가이다.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에서는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이와 함께 불평등한 계급구조도 탄생했다.그 증거가 바로 고인돌. 최고 지배자를 위한 무덤이 그 증거로 곳곳에 남아 있다. 오래된 유적은 후대에 남겨진 메시지와 같다.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면
-
-
명주사부도군
승려의 마지막 모습
명주사에서 소유하고 있는 총12기의 부도로, 승려들의 유골이나 사리 등이 보관되어 있는 무덤을 뜻한다. 12기의 부도군은 원래 여러 곳에 흩어져 있었는데 1994년 지금의 자리로 모아 보존하고 있다. 12기의 부도는 조금씩 다른 모양을 갖추고 있으며 7기는 원당형, 5기는 석종형에 속한다. 현재 4기의 비석과 함께 명주사 부도군 밭에 남아있다.
승려의 마지막 모습
죽음은 결국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막연하고 무서운 존재이지만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결국 꼭 한번 겪어야 하는 당연한 것이다. 여기, 자연의 순리대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간 승려들의 마지막 모습이 남아있다. 12명의 승려는 각자 다른 삶을 살았겠지만 자연으로 돌아감에 있어 마지막 모습은 모두 같아 보인다.먼저 생을 다한 승려들을 바라보며 감히 부처의 뜻을 헤아려본다. 허무한 삶이 되지 않으려면 자연으로 돌아가기까지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 그러나 결국, 모두에게는 끝이 있으니 그리 욕심낼 필요는 없다는 것. 승려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교훈에 잠시 고개를 숙이고 명주사의 품으로 들어가 본다.
현북면
-
-
명주사동종
산사를 울리는 깊은 소리
고려시대인 1009년 창건된 양양 명주사에 소장되어 있는 동종으로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64호이다. 1704년(숙종 30)에 제작된 조선 후기의 범종으로 그 시대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평가된다. 높이 약 83cm의 종에는 합장천부보살상과 쌍룡, 범자문, 보살, 기하학적인 무늬 등이 조각되어 있다.
산사를 울리는 깊은 소리
종의 꼭지 부분에 앉아 있는 두 마리의 용뉴. 휘어진 혀와 이빨이 유독 강조되어 있어 사나운 괴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와 대조를 이루는 종의 무늬. 특히 연꽃 가지를 들고 구름 위에 서 있는 보살은 차분하고도 평화롭다. 기대보다 크지 않은 명주사 동종은 태백산 대흥사에서 온 것이라고도 전해지는데, 그 고향이 어디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산사를 울리는 깊은 종소리. 천혜의 자연도, 천 살이 넘은 고찰도 한순간에 침묵시키는 하나의 소리가 종의 가치를 증명할 뿐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책에서도 자연에서도 만날 수 있다.하지만 오늘은 명주사의 동종이 들려주는 부처님의 말씀을 헤아려 보고 싶다.
현북면
-
-
명주사
학승들의 독서실
양양군 현북면 만월산에 있는 천년이 훌쩍 넘은 고찰이다. 창건자는 혜명, 대주 두 승려로 알려져 있으며 두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씩 따서 ‘명주사’가 되었다고 한다. 1861년, 1880년, 1897년, 1950년 등 여러 차례 화재로 소실되어 중건을 반복하였다. 예부터 월정사 주지를 지낸 종욱스님 등 이름난 학승을 많이 배출했으며,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명주사 동종을 보유하고 있는 곳이다.
학승들의 독서실
법수치계곡을 따라 오르면 작지만 천년의 시간을 품고 있는 사찰 명주사를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강원특별자치도에서 건봉사 다음으로 꼽히는 대사찰이었으나 지금은 그저 계곡과 어우러진 단아한 곳이다.전나무가 안내하는 작은 오솔길을 걸어 법당의 중심으로 들어가 본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쾌함이 정신을 맑게 만들어 준다.그리고 들려오는 청아한 종소리. 몸과 마음이 깨끗이 정돈되었다면 작은 상 앞에 바르게 앉아 사르륵 사르륵 책장을 넘겨본다. 예부터 뛰어난 학승들을 대거 배출한 명주사.아마도 그 비결은 명월산의 정기와 마음을 정리해주는 아름다운 종소리가 아니었을까.
현북면
-
-
동해신묘
바다에 올리는 기원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초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들로 보아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신묘는 바다의 신(용왕신)에게 국토수호,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로 제정되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순종 2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철폐되었다가 1993년 양양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에도 과거의 뜻을 기려 매년 해수욕장 개장식과 함께 ‘양양 동해신묘 여름해변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바다에 올리는 기원
산천과 바다에 공손히 제를 지내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던 과거. 특히 바다에 올리는 절에는 어촌 주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부디 남편과 아들이 타고 있는 쪽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휘몰아치는 파도가 작은 어촌마을을 너그럽게 봐주기를. 저 수평선 위로 낯선 왜구들의 배가 나타나지 않기를. 매년 정성껏 해신에게 제를 지내며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어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해신당. 그리고 저 깊은 바다에 간절함을 전하던 동해신묘. 그 신성한 터를 돌아보며 바닷가 사람들의 마음과 소통해 본다.
양양읍
-
-
동명서원
무신 조인벽을 기리며
문무를 겸비하고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한 고려시대 조인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곳으로 현재는 조인벽과 넷째아들인 충효의 상징 조사를 배향하고 있다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동명서원은 1787년 전란으로 전소 복원, 1868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허물어졌다가 1982년 다시 복원하여 세워졌다. 현재 경내에는 3칸의 충현사, 6칸의 재실, 협문 등이 있으며 충현사에 조인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남아있는 유물로는 서원유허비와 동명서원중건비, 동명서원중수기, 동명서원봉안문이 있다.
무신 조인벽을 기리며
고려시대 무신 양렬(襄烈) 조인벽. 1372년 왜구를 대파해 봉익대부 자리에 오른 그는 1375년에도 왜구를 토벌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1377년에는 화포를 사용해 수군을 훈련시켰고, 1380년 강릉도상원구 자리에 올라 다시 한 번 왜구 격퇴에 큰 공훈을 세운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펼치다 1388년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가담. 2등공신으로 기록 되었다. 양렬이란 호에 담긴 뜻처럼 의리 있는 조력자로 생을 다한 조인벽 선생. 관직을 벗은 후에는 양양에서 후생 양성에 전력을 다했고, 이후 그의 뜻을 기리는 유생들이 모여 세운 것이 동명서원이다. 현재 조인벽 선생의 묘는 이북에 있어 양양에서는 위패만 모시만 있지만, 통일이 되면 후손들의 마음을 꼭 조인벽의 혼이 있는 곳으로 전하려 한다.
양양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