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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부리고인돌
과거에서 지혜를 얻는다
1973년 양양군 서면 범부리에서 주민들에 의해 발견돼 ‘범부리 고인돌’로 불린다. 범부리 고인돌은 청동기 시대의 전형적인 무덤형태로 20m 간격을 두고 2기가 나란히 발견되었다. 남쪽에 위치한 1호는 탁자식의 변형으로 보이며 무덤방이라 불리는 내부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 있다.2호는 덮개돌이 둘로 갈라져 있고, 무덤방이 일부 노출되어 있다. 2기 모두 크기와 형태는 비슷하다. 범부리 고인돌 근처 남대천 계곡 앞 오토캠핑장이 위치해 있으며, 공수전 계곡과 약 15분 거리로 인근 관광지 방문 시 한번쯤 들러볼 것을 추천한다.
과거에서 지혜를 얻는다
의식주 생활에 큰 발전을 가져왔다는 청동기 시대.그때 이미 인류는 함께 살아가는 부족 생활을 영위했다고 한다.혼자보다는 공존하는 사회를 선택한 사람들.하지만 이때 탄생한 것이 계급과 국가이다. 청동기 시대 우리나라에서는 벼농사가 시작되었고, 고조선이라는 최초의 국가가 만들어졌지만 이와 함께 불평등한 계급구조도 탄생했다.그 증거가 바로 고인돌. 최고 지배자를 위한 무덤이 그 증거로 곳곳에 남아 있다. 오래된 유적은 후대에 남겨진 메시지와 같다.우리는 그 흔적을 통해 과거를 배우고, 현재를 더 좋은 세상으로 만들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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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사
오색의 비밀
오색약수터 위 작은 사찰로 신라시대 말 창건되었다. 이후 다사다난한 역사를 거쳐 꽤 긴 시간 폐사로 방치되고 있다가 근래에 법당을 세우고 성국사란 이름으로 운영하고 있다. 화려한 본당과 편리한 주차장, 쉼터 등이 잘 조성되어 있으며 설악의 풍경을 감상하러 온 등산객들이 쉬었다가는 명소이기도 하다. 오색약수터에서는 약 700m 거리로 누구라도 편하게 걸을 수 있는 트레킹 길이 조성되어 있다.
오색의 비밀
언제인지 알 수도 없는 오래전. 아담한 절 뒤뜰에 눈에 띄는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무어라 단정할 수 없는 오색의 찬란한 꽃이 피는 나무. 그리 크지 않은 나무에서는 희한하게도 그 어디서에도 볼 수 없는 오색의 꽃이 만발했다. 그 신기한 나무의 이름을 따 절의 별명도 오색석사로 불렸으며 인근의 지명도 오색리로 변경되었다.그리고 또 어느 날. 오색석사의 스님이 설악의 자연을 감상하며 계곡을 따라 걷고 있었다. 매번 오가는 산길이지만 유독 울창한 숲이 신비스럽게 아름답던 그날. 천천히 산길을 오르던 스님은 계곡 암반에서 남다른 물줄기 하나를 발견했다. 두 손을 공손히 모아 한 모금 맛보니 천하에 없는 신성한 맛. 스님이 발견한 이 약수의 이름도 이곳 지명을 붙여 오색약수로 명명되었다. 신비한 나무가 있던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이 성국사. 오색의 비밀을 품고 있는 절에는 지금도 많은 나그네들이 오가고 있다.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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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바다에 올리는 기원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초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들로 보아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신묘는 바다의 신(용왕신)에게 국토수호,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로 제정되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순종 2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철폐되었다가 1993년 양양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에도 과거의 뜻을 기려 매년 해수욕장 개장식과 함께 ‘양양 동해신묘 여름해변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바다에 올리는 기원
산천과 바다에 공손히 제를 지내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던 과거. 특히 바다에 올리는 절에는 어촌 주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부디 남편과 아들이 타고 있는 쪽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휘몰아치는 파도가 작은 어촌마을을 너그럽게 봐주기를. 저 수평선 위로 낯선 왜구들의 배가 나타나지 않기를. 매년 정성껏 해신에게 제를 지내며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어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해신당. 그리고 저 깊은 바다에 간절함을 전하던 동해신묘. 그 신성한 터를 돌아보며 바닷가 사람들의 마음과 소통해 본다.
양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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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규승가옥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된 가옥으로 정확한 건축연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 소유자 조규승 氏의 10대조가 300년 전쯤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집은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로 구분되어 있으며 ㅁ자 형태로 배치되어 있다. 팔작지붕의 안채는 앞면 5칸, 옆면 2칸의 규모이며, 사랑채를 먼저 지은 후 안채를 증축한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가운데 방 3칸을 배치하고 앞면에 툇마루가 있는 형태이며, 툇마루 양옆으로는 부엌과 창고가 위치하고 있다. ㅁ자 형태의 가옥이기 때문에 폐쇄된 안마당을 가지고 있고, 곳간채는 60년 전에 보수한 것이다.
시간이 녹아든 고택
나지막한 구릉 위에 오래된 기와집 한 채가 있다. 울창한 숲에 둘러싸여 그 품위가 더욱 돋보이는 집. 수백의 시간을 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고택은 위풍당당한 자태를 마음껏 뽐내고 있다.앞마당에서 가옥 전경을 마음껏 감상하고, 가까이 가보니 제법 낡은 나무 기둥. 그 길었던 시간은 아마도 기둥과 서까래 속에 깊이 녹아들었나 보다. 작은 그늘이 되어 주는 처마 및 툇마루에 앉아 저 먼 풍경을 가만히 바라본다. 집 뒤편 나무들을 흔드는 시원한 바람과 천천히 흘러가는 구름.오래전 이곳의 주인도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를 보려고 여기에 집을 지었나 보다.
현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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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서원
무신 조인벽을 기리며
문무를 겸비하고 왜구와 홍건적을 격퇴한 고려시대 조인벽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설립한 곳으로 현재는 조인벽과 넷째아들인 충효의 상징 조사를 배향하고 있다지방교육의 역할을 담당했던 동명서원은 1787년 전란으로 전소 복원, 1868년 흥선대원군 서원철폐령으로 허물어졌다가 1982년 다시 복원하여 세워졌다. 현재 경내에는 3칸의 충현사, 6칸의 재실, 협문 등이 있으며 충현사에 조인벽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남아있는 유물로는 서원유허비와 동명서원중건비, 동명서원중수기, 동명서원봉안문이 있다.
무신 조인벽을 기리며
고려시대 무신 양렬(襄烈) 조인벽. 1372년 왜구를 대파해 봉익대부 자리에 오른 그는 1375년에도 왜구를 토벌하며 명성을 드높였다. 1377년에는 화포를 사용해 수군을 훈련시켰고, 1380년 강릉도상원구 자리에 올라 다시 한 번 왜구 격퇴에 큰 공훈을 세운다. 이후 승승장구하며 기세를 펼치다 1388년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가담. 2등공신으로 기록 되었다. 양렬이란 호에 담긴 뜻처럼 의리 있는 조력자로 생을 다한 조인벽 선생. 관직을 벗은 후에는 양양에서 후생 양성에 전력을 다했고, 이후 그의 뜻을 기리는 유생들이 모여 세운 것이 동명서원이다. 현재 조인벽 선생의 묘는 이북에 있어 양양에서는 위패만 모시만 있지만, 통일이 되면 후손들의 마음을 꼭 조인벽의 혼이 있는 곳으로 전하려 한다.
양양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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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선불교의 종조
진전사지에 남아 있는 보물 제439호의 승탑으로 2층 기단 위에 1석을 놓고 8각 탑신석과 옥개석을 쌓은 형태이다. 높이는 약 3m이며 현재의 모습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승탑은 진전사지를 창건하고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곳에서 입적한 도의선사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형태와 여러 가지 면에서 건립된 연대를 9세기 중반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석조부도탑의 시원이 되는 가장 오래된 부도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선불교의 종조
신라시대 한 승려가 큰마음을 먹고 당나라로 떠났다. 어떤 답을 찾아 그 먼 길에 나섰는지는 모르겠으나 30년 뒤쯤 다시 나타난 승려는 겉모습도 마음가짐도 달라져있었다. 양양의 진전사로 돌아온 승려는 참선으로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는 새로운 수행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전과 불경으로만 부처를 모시던 승려들에게 참선을 통한 깨달음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행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승려의 가르침은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고, 선불교를 최초로 도입했다 하여 도의선사는 종조로까지 모셔지고 있다. 용기와 노력으로 새 길을 찾고 그 뜻을 전파하는데 힘썼던 도의선사.그의 마지막 모습을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에서 만날 수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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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지
상상으로 만나는 절
설악 끝자락에 있는 진전사는 창건 및 폐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내력 추측이 불가한 절이다. 다만 821년(헌덕왕 13)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전보다 참선을 위주로 수행하는 선불교를 신라 최초로 전래한 곳이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가 출가하여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은 곳이라 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둔전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5년 조사 당시 ‘진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진전사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삼층석탑과 도의선사묘탑, 진전사지 부도가 남아 있다.
상상으로 만나는 절
설악에 스며있는 고대의 사찰.빼어난 자연과 어우러져 기품이 넘치던 사찰은 이제 그 흔적만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한국 종교사에 큰 획을 그으며 지금까지도 놀라움을 선물하는 신라시대의 불교. 그 화려했던 기상은 진전사지에 남은 몇 개의 탑에 서려있고, 찬란했던 전성기는 고승들의 이야기로만 짐작할 수 있다. 설악의 끝자락.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공허한 빈터. 새들의 낚시터인 둔전저수지 옆을 걷다 보면 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진전사지가 기다리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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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색리삼층석탑
홀로 살고 있는 석탑
오색리 약수터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면 1km쯤 거리에 있는 절터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이곳은 옛 성국사지로 추정되는데 명확하지 않다.대지에서는 법당 자리를 추측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증거와 석탑의 잔재들이 발견 되었고, 그중 완전히 무너져 있는 것을 1971년 복원해 다시 세운 것이 오색리 삼층석탑이다. 석탑의 각 전각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으며, 탑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불탑으로 보인다.
홀로 살고 있는 석탑
완전히 사라진 절터에 드문드문 남아 있는 돌덩이들. 무참하게 흩어진 조각들을 소중히 모아 과거의 시간을 재현했다.완성하고 보니 제법 기품 있는 석탑. 하지만 그렇게 세워진 석탑은 더 비참해 보이기도 한다. 수려한 산세와 화려한 단풍으로 언제인지 알 수 없을 때부터 명성을 떨쳐온 오색. 이곳에 있던 절이라면 분명 천하를 호령할 만큼 눈부셨을 것이다.그리고 그곳에서 가장 빛났을 석탑. 전각마다 달려 있는 풍경이 바람에 찰랑이며 잔잔한 감동을 선물하고, 우아하게 하늘을 향한 석탑의 자태는 찾아온 이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제는 텅 빈 경내에서 홀로 과거의 시간을 살고 있는 석탑. 조금 더 긴 시간을 견뎌 오색의 절을 다시 만나고 그때의 소리를 다시 들려주길 기대해본다.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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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사지 삼층석탑
석탑이 들려주는 이야기
양양 서림리 들녘에서 발견된 이 석탑은 서림사지 사찰 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65년 발견 후 보존을 위해 마을 주민들과 현서분교 교장이 학교로 옮겨 복원해 두었다. 석탑은 단층 기단 위에 세워졌으며 전반적인 무늬와 모양으로 추측해 보았을 때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이 들려주는 이야기
화려한 장식도 섬세한 조각도 없는 단순한 삼층석탑. 작은 분교에 어색하게 서있는 석탑에서 집을 잃은 외로움이 느껴진다. 이곳으로 옮겨진 지 50년이 훌쩍 지났지만, 석탑의 원래 자리는 품격 있는 경내. 서림사지의 탄생과 소멸을 모두 지켜봤기에 석탑은 절터에 그대로 남아 있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장소는 조금 아쉽지만 주민들이 소중하게 지켜낸 서림사지의 증거.석탑은 자신의 나이를 보여주듯 이곳저곳이 세월에 닳아 있다.그리고 약간씩 하늘을 향해 올라간 단의 지붕들. 그 지붕 아래 새겨진 줄무늬가 고려시대 것임을 말해 준다. 그러고 보니 석탑은 이미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어쩌면 우리가 아직 해석하지 못한 흔적도 충분히 남아 있을지 모른다. 삼층석탑이 품고 있을 서림사지의 나머지 이야기.그 흥미진진한 역사가 꽤 궁금하다.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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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의상대
부처를 만나는 정자
의상대사가 중국 당나라에서 돌아와 낙산사를 지을 때 이곳에 올라 직접 산세를 살폈다고 전해지며, 의상대사의 좌선 수행처라고도 알려져 있다. 1925년 건립 후 폭풍, 붕괴위험 등을 이유로 여러 번의 중건을 거쳤으며 현재의 의상대는 1995년 8월, 육각정으로 복원된 모습이다. 낙산사에서 관음굴로 가는 언덕 위 자리하고 있고, 의상대에서 내려 보는 동해의 풍경과 해안절경이 유독 빼어나 ‘관동팔경’으로 손꼽힌다.
부처를 만나는 정자
신라의 고승은 꿈에 나온 부처의 뜻에 따라 바다 앞 언덕에 절을 세웠다.그리고 해안가 암석 위, 털썩 주저앉아 좌선을 시작했다. 부족한 마음을 꾸짖듯 철썩거리는 소리와온 몸을 휘돌아 나가는 냉정한 바람. 이 모든 것이 부처의 따사로운 자비로 느껴질 때까지고승은 외로이 앉아 하염없이 불경을 되새긴다. 그리고 1925년, 이곳에 고승의 이름을 딴 정자가 만들어졌다.낙산사 의상대.이곳에 바르게 앉아 과거의 고승에게 조용히 묻는다.“여기서 부처를 만나셨는지요.”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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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림원지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이다. 발굴 당시 출토된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후 대량 출토된 기와나 삼층석탑, 석등, 비석귀부 등 유물들로 추측해 보았을 때 9세기 후반 대대적인 중창이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건물지와 선림원지삼층석탑, 선림원지석등, 홍각선사탑비 귀부 및 이수, 선림원지부도 등이 남아 있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흔적
고상한 기품과 맞배지붕의 단아한 멋을 품고 있던 사찰. 금당과 조사당 등 여러 법당들이 어우러져 누군가의 휴식처이자 기도처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곳. 푸른 산과 한 몸인 것처럼 자연에 녹아있던 아름다운 사찰은 이제 그 흔적만이 처참하게 남아있다.9세기 말 화려한 중창 후 태풍과 홍수로 산이 무너져 폐사된 걸로 추정되는 이 절에는 현재 주춧돌과 건물지, 삼층석탑 등 몇몇 유물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한때는 누구보다 사랑받으며 존재감을 빛냈을 멋있는 사찰. 이제는 그 모습을 기억하는 이도 없고, 엣 흔적을 찾아오는 이도 매우 드물다. 지금은 그저 오래된 흔적만 어렴풋이 남아있는 절터.하지만 이곳에서 우리의 역사는 찬란하게 쓰였을 것이다.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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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림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양양 서림사지 절터에서 삼층석탑과 함께 발견된 불상으로 강원특별자치도 문화재자료 제119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5년 발견 후 현서분교로 옮겨져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으나, 발견 당시부터 머리가 일부 없고, 불신도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특히 팔각형의 대좌는 조각 수법이 매우 우수한데 일부 부재가 없어지고 위치가 뒤바뀐 것을 볼 수 있다. 크기는 전체 높이 240cm, 불상 높이 125cm이다. 발견 당시 불상의 주변에는 주춧돌들이 일렬로 놓여 있었는데,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약사여래입상 금동불상 1점이 함께 발견되었다. 현재 금동불상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부처에게 전하는 마음
원래의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손상된 돌조각. 자세히 보아하니 두 손을 가슴에 모아 오른손으로 왼손 검지를 감싼 것처럼 보인다. 이런 자세를 하고 있는 부처를 ‘비로사나불’이라고 부른다. 인간이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광명(光明)의 부처이다. 직접 만날 수 없는 부처님 대신 우리는 불상이란 존재를 만들었고 부처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람을 불상에게 대신 기원한다.불경에 따르면 미혹에 결박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맑은 믿음으로 의심하지 않으면 어디에서든지 그를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선림사지 터에서 발견된 얼굴 없는 불상에게 안녕과 건강을 기원해 본다. 비록 깨지고 흐트러진 불상이어도 부처에게 그 뜻을 고이 전해주리라.
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