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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
노송과 바다
해변에 기암적별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꼭대기 노송이 자리하고 있다. 양양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는 곳으로 1955년 건립된 작은 정자(하조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풍경이 일품이다. 하조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휴양한 조선의 개국 공신, 하륜과 조준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2009년 명승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하조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고운 모래를 자랑하는 하조대 해수욕장이 위치해 있다.
노송과 바다
파도에 깎인 기암괴석 위, 200살을 넘긴 노송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아무리 한결같은 것이 소나무라지만 너무도 긴 세월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자리를 지키는 노송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예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딴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다.그만큼 산수자연의 위상이 남다른 하조대.암석 위 노송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거친 수많은 이들이 무엇을 얻어 갔는지는 알 수 있다. 큰 바다에 지지 않는 노송의 기상과.긴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를 지켜주는 자연의 정도.
현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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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담장
마음을 달리하면 느껴지는 것
조선 전기 세조(1455~1468) 시절 낙산사를 고쳐 지으며 원통보전(법당) 둘레에 사각으로 쌓은 담장이다. 이후 원래의 담장은 거의 사라지고 일부분만 원형으로 남아 있어 최근 보수를 통해 전체를 연결하여 다시 쌓았다. 담장의 형태는 기와와 흙을 차례대로 쌓은 형식으로, 중간에 규칙적으로 화강암을 넣어 고유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1971년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7m 길이 220m이다.
마음을 달리하면 느껴지는 것
세속의 번뇌를 씻기 위해 들어가는 절. 신성한 법당으로 들어서면 그곳이 풍기는 위엄에 어쩐지 고개를 숙이게 된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낙산사도 마찬가지. 원통보전에 들어서기 전 독특한 무늬의 담벼락이 벌써 마음가짐을 바로잡게 만든다. 마치 신성한 구역과 속세의 경계를 알려주는 듯 법당을 단호하게 감싸고 있는 황토색 담장. 그 위로 보이는 원통보전의 거대한 지붕이 담장 안쪽을 더욱 엄하게 만든다. 마음을 가다듬고, 큰 용기를 내듯 담장 사이 작은 문을 지나 법당 앞으로 들어간다. 순간 달라지는 담장의 존재. 모든 걸 포근하게 감싸주고 보호하는 것처럼 법당과 나를 하나로 묶으며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겉과 속이 똑같은 낙산사의 담장.안과 밖에서 달라진 건 내 마음가짐뿐이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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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선사유적
시간을 건너 通하는 정서
1977년 쌍호를 매몰하고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석기, 토기가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여러 차례 조사 결과 총 6개의 자연층위가 나타났으며, 이 중 하나의 층에서만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민무늬토기, 덧띠토기, 뾰족바닥형 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주로 발견되었으며, 한국 최초 강자갈을 타원형으로 쌓아 만든 야외 돌구이 돌무지 시설도 발견되었다.유적지 바로 옆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관람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다.
시간을 건너 通하는 정서
오산리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집터는 총 14곳.짚으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움집들이 신석기 시대의 마을을 잘 보여준다. 주민들이 사용했을 각종 토기들과 집 중앙에서 불을 피웠던 화덕의 흔적도 이곳에서 함께 발견되었다. 그중 특별하게 다가온 건 야외에서 확인된 5기의 화덕. 일종의 공동취사장으로 사용됐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재현된 유적지를 돌아보니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경치 좋은 자연으로 찾아가 삼각형의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해먹는 모습. 주민들이 모여 마을 잔치를 열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일상의 풍경. 8천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멀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을 건너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괜히 반갑게 느껴진다.
손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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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련암
꿈과 소원이 이뤄지는 곳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해안 절벽 위 작은 법당으로 ‘한국 3대 관음성지’라 불린다. 오래전 의상이 바닷속에서 나타난 연꽃에 소원을 빌었는데 뜻대로 성취되자 이곳에 ‘붉은 연꽃이 바다에서 나타났다’라는 이름을 담아 홍련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법당은 1869년(고중 6)에 중건된 것으로 목조 기와 건물로 건립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50cm가 조금 넘는 작은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입구 왼쪽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삼족섬이 놓여있다.
꿈과 소원이 이뤄지는 곳
홍련암으로 들어가기 전 법당 왼쪽에 다리가 세 개인 두꺼비가 앉아 있다. 삼족섬이라 불리는 이 두꺼비를 만지면 꿈과 소원이 이뤄진다고 전해진다.삼족섬에 조심스럽게 소원을 빌고, 드디어 기대했던 홍련암을 마주해 본다. 해안 절벽 가장 끝.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이곳을 보금자리로 정한 작은 암자 홍련암. 코앞에서 사납게 철썩이는 파도가 무섭지도 않은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터전을 지켜왔다. 생각보다 훨씬 소박한 홍련암은 신통하게도 소원이 이뤄지는 명소.이곳을 창건한 의상스님도 여기에 소원을 빌어 성취했다 전해진다. 삼족섬에게 전했던 소원을 다시 한 번 바다를 향해 빌어본다. 그러다 문득 벼랑 끝에 서 있는데 못 할 일이 없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홍련암이 주는 깨달음과 용기. 어쩌면 그 힘이 스스로의 꿈과 소원을 이루게 하는 건 아닐까.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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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예문
지금도 역사는 쓰인다.
1467년(세조 13) 왕이 낙산사에 행차한다는 얘기를 듣고 양양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돌을 가져와 무지개 모양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문을 이루고 있는 총 26개의 화강석은 당시 강원특별자치도 내 고을 수 26개를 표현했다고 한다. 문의 기단부에는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쌓았고, 그 위에 화강석을 앞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현재 홍예문 위에는 2005년 화재로 다시 건립된 문루(文樓)가 세워져 있다.
지금도 역사는 쓰인다.
낙산사 원통보전을 둘러보고 사천왕문을 지나 걸어가면 누각 아래 무지개 모양의 석문이 기다리고 있다.거칠게 다듬어진 제각각의 바위들과 정교하게 성형된 화강석이 이룬 조화. 성벽처럼 세워진 돌담 중간에는 꽤 넓은 통로가 동그랗게 열려있다. 창건 이후 커다란 화재들로 소실과 재건을 여러 번 겪은 천년고찰 낙산사.그 안타까운 아픔의 기록에는 이 홍예문도 포함되어 있다. 1963년 세워진 홍예문 위의 누각은 2005년 화재로 전체 소실.하단의 석문도 불길이 남긴 까만 흔적으로 손쓸 틈 없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기에.낙산사는 열심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더욱 단단해진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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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칠층석탑
낙산사 원통보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칠층석탑은 보물 제499호로 낙산사의 보물인 두 보주(보배로운 구슬)를 간직하고 있는 석탑이다. 1466년(세조12) 3층에서 7층으로 중수되었다고 전해지며, 높이 6.2m, 상륜부 1.4m로 위쪽에 24개의 잎을 가진 겹송이 연꽃이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양을 이루고 있지만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평가된다.
강인한 석탑의 임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절 마당에 기품 있는 그림을 그려준다.간단한 구조로 화려함은 없지만 단정하고 고상한 칠층석탑.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앉은 석탑의 키가 적당함의 미학을 일깨워 준다. 전쟁과 태풍, 침략과 화재. 거칠고 모진 긴 세월을 꿋꿋하게 견뎌낸 칠층석탑. 이 돌탑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건 낙산사의 두 보물, 보주이다.자신의 일부가 깨지고 부서져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칠층석탑의 놀라운 견고함에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는 의지도 있었으리라.오늘도 절 마당에 자신의 키보다 더 긴 그림자를 그리며강인한 석탑은 본인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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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자비로운 눈빛
낙산사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크기 112cm의 불상으로 보물 제1362호이다. 건칠이라는 것은 나무, 종이, 천으로 만들어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도금한 것을 말한다. 고려 후기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사찰을 복구할 때쯤 낙산사에서 약 8km 떨어진 설악산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자비로운 눈빛
원통보전에 들어서면 고개만 앞으로 약간 숙여 나를 굽어보는 우아한 자태의 불상이 있다. 높고 화려한 보관과 온몸을 두르고 있는 구슬 장식.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자락이 유난히 더 반짝거리며 화려한 품위를 더해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불상을 바라보니,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수 십 가지 표정이 담겨 있다. 아래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과 적당히 오뚝한 코, 슬며시 미소를 지었으나 단호하게 다문 것 같은 붉은 입술. 자비로워 보이기도, 엄해 보이기도 하는 불상의 눈빛에 길게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자꾸 돌리게 된다.자정기의(自淨基意).부처는 스스로의 뜻과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라고 했다. 다시 이 불상 앞에 설 때에는 괜한 부끄러움도 없이 와야겠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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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및 사리장엄구
낙산사 홍련암 관음상에 다시 금칠을 하는 중 공중에서 사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모시기 위해 1692년(숙종 18)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사리탑 1기와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사리 보관용 장치) 37점, 사리탑 조성 기록이 새겨진 사리비 1기를 낙산사에서 볼 수 있다.특히 사리탑, 사리비, 사리장엄구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조선 후기의 유물로 당시의 공예기술과 직물류 제작 수준을 파악할 수 있어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역사가 보관된 석탑
양양의 명소 낙산사는 단순한 종교의 의미를 넘어 우리의 역사를 지켜온 곳이다. 경내 곳곳에 남아 있는 보물과 유물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비, 사리장엄구도 마찬가지. 과거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뜻과 정취, 불교의 의미와 사상까지 이 작은 탑 안에 모두 담겨져 있었다. 승려의 흔적을 모셔둔 유물에서 당시의 문화를 발견했고, 그 모든 과정의 상세한 기록으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기암절벽 위 바다를 바라보고 선 사리탑 하나에 한 시대가 보관되어 있다. 사리탑을 만들며 이 절경을 바라봤을 선조들의 시간에 지금 나의 시간을 더해본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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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회첩
젊은이들의 조력자
'기구회첩은 1761년 중국 양양의 기구회를 본떠 창립한 양양군 유지들의 친목모임인 기구회의 회첩으로 동명이지(同名異地)의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고, 현재까지도 기구회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어 지역의 미풍양속 등 향토문화의 계승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젊은이들의 조력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 과학과 의학, 기술의 진보로 인류의 난제인 수명 연장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더 긴 인생을 얻었고, 시대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설사 젊음이 조금 길어졌다 해도 결국 사람은 노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당연한 순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2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양양의 ‘기구회’.지역의 원로들이 모여 젊은이들이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을 이어왔다. 덕분에 지켜져야 할 문화는 바르게 계승되었고, 비록 사라졌어도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가치 있는 것들이 기록되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우리가 가게 될 그 길을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건 어떨까.
손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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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지 도의선사탑
선불교의 종조
진전사지에 남아 있는 보물 제439호의 승탑으로 2층 기단 위에 1석을 놓고 8각 탑신석과 옥개석을 쌓은 형태이다. 높이는 약 3m이며 현재의 모습은 무너져 있던 것을 1968년 다시 세운 것이다. 이 승탑은 진전사지를 창건하고 당나라에서 선종을 공부하고 돌아와 이곳에서 입적한 도의선사 것으로 추정된다. 탑의 형태와 여러 가지 면에서 건립된 연대를 9세기 중반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 석조부도탑의 시원이 되는 가장 오래된 부도로서 큰 의미를 지닌다.
선불교의 종조
신라시대 한 승려가 큰마음을 먹고 당나라로 떠났다. 어떤 답을 찾아 그 먼 길에 나섰는지는 모르겠으나 30년 뒤쯤 다시 나타난 승려는 겉모습도 마음가짐도 달라져있었다. 양양의 진전사로 돌아온 승려는 참선으로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는 새로운 수행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경전과 불경으로만 부처를 모시던 승려들에게 참선을 통한 깨달음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파격적인 행태였다. 하지만 지금, 그 승려의 가르침은 조계종이란 이름으로 이어지고 있고, 선불교를 최초로 도입했다 하여 도의선사는 종조로까지 모셔지고 있다. 용기와 노력으로 새 길을 찾고 그 뜻을 전파하는데 힘썼던 도의선사.그의 마지막 모습을 진전사지 도의선사탑에서 만날 수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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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전사지
상상으로 만나는 절
설악 끝자락에 있는 진전사는 창건 및 폐사에 대한 기록이 없어 내력 추측이 불가한 절이다. 다만 821년(헌덕왕 13) 도의선사가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경전보다 참선을 위주로 수행하는 선불교를 신라 최초로 전래한 곳이며, [삼국유사]를 지은 일연선사가 출가하여 구족계(비구와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를 받은 곳이라 한다. 1960년대 이전까지는 ‘둔전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왔으나 1975년 조사 당시 ‘진전’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가 발견되어 진전사라는 이름을 찾게 되었다. 현재 진전사지에는 삼층석탑과 도의선사묘탑, 진전사지 부도가 남아 있다.
상상으로 만나는 절
설악에 스며있는 고대의 사찰.빼어난 자연과 어우러져 기품이 넘치던 사찰은 이제 그 흔적만이 아련하게 남아있다. 한국 종교사에 큰 획을 그으며 지금까지도 놀라움을 선물하는 신라시대의 불교. 그 화려했던 기상은 진전사지에 남은 몇 개의 탑에 서려있고, 찬란했던 전성기는 고승들의 이야기로만 짐작할 수 있다. 설악의 끝자락. 소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는 공허한 빈터. 새들의 낚시터인 둔전저수지 옆을 걷다 보면 상상으로만 만날 수 있는 진전사지가 기다리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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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신묘
바다에 올리는 기원
낙산해수욕장 인근에 위치한 곳으로 강원특별자치도 기념물 제73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초로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들로 보아 고려 공민왕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동해신묘는 바다의 신(용왕신)에게 국토수호, 국태민안을 기원하며 제를 지내던 곳으로, 조선 초기에 국가제사로 제정되어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왔다. 이후 순종 2년 일제에 의해 건물이 철폐되었다가 1993년 양양군에 의해 복원되었다. 현재에도 과거의 뜻을 기려 매년 해수욕장 개장식과 함께 ‘양양 동해신묘 여름해변 용왕제’를 올리고 있다.
바다에 올리는 기원
산천과 바다에 공손히 제를 지내며 나라의 평안을 기원했던 과거. 특히 바다에 올리는 절에는 어촌 주민들의 애환이 담겨 있었다.부디 남편과 아들이 타고 있는 쪽배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기를.휘몰아치는 파도가 작은 어촌마을을 너그럽게 봐주기를. 저 수평선 위로 낯선 왜구들의 배가 나타나지 않기를. 매년 정성껏 해신에게 제를 지내며 주민들은 불안한 마음을 억지로 잠재웠다. 어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해신당. 그리고 저 깊은 바다에 간절함을 전하던 동해신묘. 그 신성한 터를 돌아보며 바닷가 사람들의 마음과 소통해 본다.
양양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