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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정
작은 섬이 보여주는 위대함
양양군 현남면에 위치한 죽도는 완벽하게 독립된 섬이었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육지와 접하고 있다. 사계절 송죽이 울창하여 ‘죽도’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이 섬의 장죽은 유독 강인해 조선시대 조정에 진상될 정도였다고 한다. 정상의 죽도정 정자는 1965년 현남면 내 부호들이 행정 지원을 받아 건립한 것으로 팔각집우 전면 3칸, 측면2칸으로 이뤄져있다. 짙은 송죽향을 느낄 수 있는 산책로와 둘레길이 유명하며 죽도정 정상에서 양양의 청정 바다를 전망할 수 있다.
작은 섬이 보여주는 위대함
사시사철 송죽이 울창한 작은 섬. 둘레 1km, 높이 53m의 작은 섬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오직 파도 소리만 들려오는 죽도로 들어가 제법 우아한 정자에 올라본다.탄성과 함께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가만히 서서야 느껴지는 진한 솔향과 죽향.자로 잰 듯 그어진 한 줄의 수평선까지 확인하고 나서야죽도정이 품고 있는 그림이 얼마나 위대한지 깨닫게 된다. 섬의 크기는 중요하지 않다. 그곳엔 이미 하늘과 바다가 담겨있으니.
현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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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조대
노송과 바다
해변에 기암적별이 우뚝 솟아 있고 그 꼭대기 노송이 자리하고 있다. 양양 최고의 경승지로 꼽히는 곳으로 1955년 건립된 작은 정자(하조대)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풍경이 일품이다. 하조대라는 이름은 이곳에서 휴양한 조선의 개국 공신, 하륜과 조준의 앞 글자를 따서 지어졌다고 전해진다. 2009년 명승 제6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 하조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닷가에 고운 모래를 자랑하는 하조대 해수욕장이 위치해 있다.
노송과 바다
파도에 깎인 기암괴석 위, 200살을 넘긴 노송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아무리 한결같은 것이 소나무라지만 너무도 긴 세월 그리 편해 보이지 않는 자리를 지키는 노송의 마음이 궁금해진다. 예부터 이곳을 한번 거친 이는 딴사람이 된다는 말이 있다.그만큼 산수자연의 위상이 남다른 하조대.암석 위 노송의 속내는 알 수 없지만, 이곳을 거친 수많은 이들이 무엇을 얻어 갔는지는 알 수 있다. 큰 바다에 지지 않는 노송의 기상과.긴 세월을 함께하며 서로를 지켜주는 자연의 정도.
현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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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담장
마음을 달리하면 느껴지는 것
조선 전기 세조(1455~1468) 시절 낙산사를 고쳐 지으며 원통보전(법당) 둘레에 사각으로 쌓은 담장이다. 이후 원래의 담장은 거의 사라지고 일부분만 원형으로 남아 있어 최근 보수를 통해 전체를 연결하여 다시 쌓았다. 담장의 형태는 기와와 흙을 차례대로 쌓은 형식으로, 중간에 규칙적으로 화강암을 넣어 고유의 무늬를 만들어 냈다. 1971년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되었으며 높이 3.7m 길이 220m이다.
마음을 달리하면 느껴지는 것
세속의 번뇌를 씻기 위해 들어가는 절. 신성한 법당으로 들어서면 그곳이 풍기는 위엄에 어쩐지 고개를 숙이게 된다. 천년의 역사를 품은 낙산사도 마찬가지. 원통보전에 들어서기 전 독특한 무늬의 담벼락이 벌써 마음가짐을 바로잡게 만든다. 마치 신성한 구역과 속세의 경계를 알려주는 듯 법당을 단호하게 감싸고 있는 황토색 담장. 그 위로 보이는 원통보전의 거대한 지붕이 담장 안쪽을 더욱 엄하게 만든다. 마음을 가다듬고, 큰 용기를 내듯 담장 사이 작은 문을 지나 법당 앞으로 들어간다. 순간 달라지는 담장의 존재. 모든 걸 포근하게 감싸주고 보호하는 것처럼 법당과 나를 하나로 묶으며 오히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겉과 속이 똑같은 낙산사의 담장.안과 밖에서 달라진 건 내 마음가짐뿐이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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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선사유적
시간을 건너 通하는 정서
1977년 쌍호를 매몰하고 농지로 전용하기 위한 작업 중 석기, 토기가 발견되어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여러 차례 조사 결과 총 6개의 자연층위가 나타났으며, 이 중 하나의 층에서만 청동기시대 유물이 발견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민무늬토기, 덧띠토기, 뾰족바닥형 토기 등 다양한 토기들이 주로 발견되었으며, 한국 최초 강자갈을 타원형으로 쌓아 만든 야외 돌구이 돌무지 시설도 발견되었다.유적지 바로 옆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관람하며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다.
시간을 건너 通하는 정서
오산리선사유적지에서 발견된 집터는 총 14곳.짚으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움집들이 신석기 시대의 마을을 잘 보여준다. 주민들이 사용했을 각종 토기들과 집 중앙에서 불을 피웠던 화덕의 흔적도 이곳에서 함께 발견되었다. 그중 특별하게 다가온 건 야외에서 확인된 5기의 화덕. 일종의 공동취사장으로 사용됐을 거라 추측하고 있다. 이해하기 쉽게 재현된 유적지를 돌아보니 지금의 우리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경치 좋은 자연으로 찾아가 삼각형의 텐트를 치고, 야외에서 불을 피워 요리를 해먹는 모습. 주민들이 모여 마을 잔치를 열고, 함께 음식을 나눠 먹는 일상의 풍경. 8천 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멀게 느껴지지만, 그 시간을 건너도 통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괜히 반갑게 느껴진다.
손양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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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로/왜가리 번식지
새들이 고른 명당
1970년 천연기념물 제229호로 지정된 현남면 포매리 백로, 왜가리 번식지는 동해안 최대 번식지로 그 면적이 약 26만 7,892㎡이다. 이곳에는 수령이 100년 이상인 소나무들을 비롯하여 잣나무, 밤나무, 참나무 등이 멋스럽게 자라고 있으며, 한 나무에 4~5쌍의 왜가리, 백로가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도래 시기는 2월 말에서 3월 초순경이며 4월 중순에 산란, 5월 부화, 10월~11월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필리핀 쪽으로 이동한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사진촬영 시에는 둥지에 가까이 접근하지 않아야하며, 큰 소음을 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새들이 고른 명당
사람은 집을 고를 때 햇볕이 잘 들고, 물이 콸콸 나오고, 튼튼한 벽체로 지어진 집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백로와 왜가리는 어떤 기준으로 집을 골랐을까? 우리나라 전 지역에 걸쳐 서식하는 백로와 왜가리가 가장 큰 규모를 만들어 살고 있는 곳이 바로 양양의 포매리이다. 이곳은 오래된 노송들이 단단한 울타리가 되어주고, 바다로 향하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먹이가 풍부해 새들에게는 낙원과 같은 곳이다. 새들이 집을 고르는 기준도 사람의 안목과 다르지 않다.안전하고, 풍요롭고, 청정한 공간.그러니 백로와 왜가리들이 고른 양양의 명당은 두말할 것 없이 아름다운 풍경이 살아있는 곳이다.
현남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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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련암
꿈과 소원이 이뤄지는 곳
676년(신라 문무왕 16)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해안 절벽 위 작은 법당으로 ‘한국 3대 관음성지’라 불린다. 오래전 의상이 바닷속에서 나타난 연꽃에 소원을 빌었는데 뜻대로 성취되자 이곳에 ‘붉은 연꽃이 바다에서 나타났다’라는 이름을 담아 홍련암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지금의 법당은 1869년(고중 6)에 중건된 것으로 목조 기와 건물로 건립되어 있다. 법당 안에는 50cm가 조금 넘는 작은 관음보살좌상이 모셔져 있으며 입구 왼쪽에는 소원을 들어주는 삼족섬이 놓여있다.
꿈과 소원이 이뤄지는 곳
홍련암으로 들어가기 전 법당 왼쪽에 다리가 세 개인 두꺼비가 앉아 있다. 삼족섬이라 불리는 이 두꺼비를 만지면 꿈과 소원이 이뤄진다고 전해진다.삼족섬에 조심스럽게 소원을 빌고, 드디어 기대했던 홍련암을 마주해 본다. 해안 절벽 가장 끝. 낭떠러지나 다름없는 이곳을 보금자리로 정한 작은 암자 홍련암. 코앞에서 사납게 철썩이는 파도가 무섭지도 않은지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터전을 지켜왔다. 생각보다 훨씬 소박한 홍련암은 신통하게도 소원이 이뤄지는 명소.이곳을 창건한 의상스님도 여기에 소원을 빌어 성취했다 전해진다. 삼족섬에게 전했던 소원을 다시 한 번 바다를 향해 빌어본다. 그러다 문득 벼랑 끝에 서 있는데 못 할 일이 없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홍련암이 주는 깨달음과 용기. 어쩌면 그 힘이 스스로의 꿈과 소원을 이루게 하는 건 아닐까.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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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홍예문
지금도 역사는 쓰인다.
1467년(세조 13) 왕이 낙산사에 행차한다는 얘기를 듣고 양양 강현면 정암리 길가의 돌을 가져와 무지개 모양으로 쌓았다고 전해진다.문을 이루고 있는 총 26개의 화강석은 당시 강원특별자치도 내 고을 수 26개를 표현했다고 한다. 문의 기단부에는 2단의 큼직한 자연석을 쌓았고, 그 위에 화강석을 앞뒤 두 줄로 쌓아 둥근 문을 만들었다. 현재 홍예문 위에는 2005년 화재로 다시 건립된 문루(文樓)가 세워져 있다.
지금도 역사는 쓰인다.
낙산사 원통보전을 둘러보고 사천왕문을 지나 걸어가면 누각 아래 무지개 모양의 석문이 기다리고 있다.거칠게 다듬어진 제각각의 바위들과 정교하게 성형된 화강석이 이룬 조화. 성벽처럼 세워진 돌담 중간에는 꽤 넓은 통로가 동그랗게 열려있다. 창건 이후 커다란 화재들로 소실과 재건을 여러 번 겪은 천년고찰 낙산사.그 안타까운 아픔의 기록에는 이 홍예문도 포함되어 있다. 1963년 세워진 홍예문 위의 누각은 2005년 화재로 전체 소실.하단의 석문도 불길이 남긴 까만 흔적으로 손쓸 틈 없이 훼손되었다. 하지만 역사는 과거에만 쓰이는 것이 아니기에.낙산사는 열심히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지금, 더욱 단단해진 마음으로 우리와 함께 숨 쉬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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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칠층석탑
낙산사 원통보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칠층석탑은 보물 제499호로 낙산사의 보물인 두 보주(보배로운 구슬)를 간직하고 있는 석탑이다. 1466년(세조12) 3층에서 7층으로 중수되었다고 전해지며, 높이 6.2m, 상륜부 1.4m로 위쪽에 24개의 잎을 가진 겹송이 연꽃이 자리하고 있다.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양을 이루고 있지만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석탑으로 평가된다.
강인한 석탑의 임무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절 마당에 기품 있는 그림을 그려준다.간단한 구조로 화려함은 없지만 단정하고 고상한 칠층석탑. 그리 높지도, 그리 낮지도 앉은 석탑의 키가 적당함의 미학을 일깨워 준다. 전쟁과 태풍, 침략과 화재. 거칠고 모진 긴 세월을 꿋꿋하게 견뎌낸 칠층석탑. 이 돌탑이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건 낙산사의 두 보물, 보주이다.자신의 일부가 깨지고 부서져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칠층석탑의 놀라운 견고함에는 자신의 임무를 다하려는 의지도 있었으리라.오늘도 절 마당에 자신의 키보다 더 긴 그림자를 그리며강인한 석탑은 본인의 임무를 다하고 있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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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
자비로운 눈빛
낙산사 원통보전에 봉안되어 있는 크기 112cm의 불상으로 보물 제1362호이다. 건칠이라는 것은 나무, 종이, 천으로 만들어 그 위에 옻칠을 하고 다시 도금한 것을 말한다. 고려 후기의 전통양식을 바탕으로 만든,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6.25전쟁 후 폐허가 된 사찰을 복구할 때쯤 낙산사에서 약 8km 떨어진 설악산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진다.
자비로운 눈빛
원통보전에 들어서면 고개만 앞으로 약간 숙여 나를 굽어보는 우아한 자태의 불상이 있다. 높고 화려한 보관과 온몸을 두르고 있는 구슬 장식.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옷자락이 유난히 더 반짝거리며 화려한 품위를 더해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불상을 바라보니, 둥글고 부드러운 얼굴에 수 십 가지 표정이 담겨 있다. 아래를 지긋이 바라보는 눈과 적당히 오뚝한 코, 슬며시 미소를 지었으나 단호하게 다문 것 같은 붉은 입술. 자비로워 보이기도, 엄해 보이기도 하는 불상의 눈빛에 길게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자꾸 돌리게 된다.자정기의(自淨基意).부처는 스스로의 뜻과 마음을 항상 깨끗이 하라고 했다. 다시 이 불상 앞에 설 때에는 괜한 부끄러움도 없이 와야겠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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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해수관음공중사리탑 및 사리장엄구
낙산사 홍련암 관음상에 다시 금칠을 하는 중 공중에서 사리가 떨어졌다고 한다. 이를 모시기 위해 1692년(숙종 18) 세워졌다고 전해지는 사리탑 1기와 사리탑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사리 보관용 장치) 37점, 사리탑 조성 기록이 새겨진 사리비 1기를 낙산사에서 볼 수 있다.특히 사리탑, 사리비, 사리장엄구를 모두 갖춘 보기 드문 조선 후기의 유물로 당시의 공예기술과 직물류 제작 수준을 파악할 수 있어 귀한 자료로 여겨진다.
역사가 보관된 석탑
양양의 명소 낙산사는 단순한 종교의 의미를 넘어 우리의 역사를 지켜온 곳이다. 경내 곳곳에 남아 있는 보물과 유물들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다. 해수관음공중사리탑과 비, 사리장엄구도 마찬가지. 과거의 문화와 예술, 선조들의 뜻과 정취, 불교의 의미와 사상까지 이 작은 탑 안에 모두 담겨져 있었다. 승려의 흔적을 모셔둔 유물에서 당시의 문화를 발견했고, 그 모든 과정의 상세한 기록으로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볼 수 있었다. 기암절벽 위 바다를 바라보고 선 사리탑 하나에 한 시대가 보관되어 있다. 사리탑을 만들며 이 절경을 바라봤을 선조들의 시간에 지금 나의 시간을 더해본다.
강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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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국사지
화려했던 과거를 숨겨버린 절터
오색약수터에서 주전골 계곡을 따라 1km 가량 오르면 옛 성국사지 절터에 도착한다. 성국사지는 통일신라시대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법당자리를 알아볼 수 있는 흔적들과 층계에 쓰였을 난간석이 남아 있다. 서쪽에는 1971년 복원된 삼층석탑이 있고 동쪽에는 또 다른 석탑의 기단석만 남아 있다.절터는 약 700평 정도이다. 성국사지 터 바로 앞에는 근래에 지어진 성국사 절이 있으니 함께 둘러보는 것을 추천한다.
화려했던 과거를 숨겨버린 절터
불교의 꽃을 피운 통일신라시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 석가탑과 다보탑도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 같은 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또 하나의 절이 있다.태백산맥의 정기와 동해의 기상이 만나는 곳. 양양 오색리에 위치한 성국사지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성국사지 터에는 일부 복원된 석탑 1기와, 무너져있는 석탑 1기, 법당의 자리를 보여주는 돌덩이 몇 개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범상치 않은 위치 선정과 설립된 시대를 보아 그 어떤 절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수려했을 경내.화려한 과거를 숨겨버린 텅 빈 절터를 걸으며 남아있는 석탑에 말을 걸어 아쉬움을 달래보자.
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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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회첩
젊은이들의 조력자
'기구회첩은 1761년 중국 양양의 기구회를 본떠 창립한 양양군 유지들의 친목모임인 기구회의 회첩으로 동명이지(同名異地)의 문화를 비교해 볼 수 있고, 현재까지도 기구회의 명맥이 이어져 오고 있어 지역의 미풍양속 등 향토문화의 계승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젊은이들의 조력자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세상. 과학과 의학, 기술의 진보로 인류의 난제인 수명 연장의 꿈이 실현되고 있다. 덕분에 우리는 더 긴 인생을 얻었고, 시대는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세상 어디에도 늙지 않는 사람은 없다. 설사 젊음이 조금 길어졌다 해도 결국 사람은 노년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 당연한 순리를 알면서도 우리는, 노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250여 년의 전통을 가진 양양의 ‘기구회’.지역의 원로들이 모여 젊은이들이 더 나은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조력하는 일을 이어왔다. 덕분에 지켜져야 할 문화는 바르게 계승되었고, 비록 사라졌어도 지금의 우리를 있게 한 가치 있는 것들이 기록되었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늙지 않는다고 했다.우리가 가게 될 그 길을 앞서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보는 건 어떨까.
손양면